한 사람의 삶과 작업은 시간이 흐르며 끊임없이 변한다. 특히 평생에 걸쳐 자신의 화두를 쌓아가는 작가에게 집과 작업실은 단순한 거주와 생산의 공간을 넘어, 창작의 과정과 일상이 함께 축적되는 장소가 된다. ‘이작가의 집’은 이러한 작가의 삶을 하나의 완성된 형식에 담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변화와 성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데서 출발했다. 생활과 작업, 사람들과의 만남은 층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뉘고 겹치며, 대형 작품의 이동과 균질한 작업 환경 같은 현실적인 조건도 공간의 형태를 결정한다.
이 집은 완공된 순간을 최종적인 모습으로 여기지 않는다. 구조와 설비를 감추기보다 드러내고, 고치고 교체할 수 있도록 하며, 공간 역시 정해진 이름과 용도에 머무르지 않도록 열어두었다. 시간이 지나 작업 도구와 작품, 생활의 흔적이 쌓이면서 건축은 점차 거주자의 것이 되어간다. 2026 서울특별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한 ‘이작가의 집’을 통해, 건축가가 한 사람의 고유한 삶에 어떻게 밀착하고 그 변화의 가능성을 공간으로 남겼는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Editor 김도아
▼ List ▼
→ [작가의 삶을 담는 공간]
→ [덜어내고 열어두는 건축]
→ [집이 삶과 도시를 만나는 방식]
[작가의 삶을 담는 공간]

– ‘이작가의 집’은 한 사람의 거주와 작업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간이에요. 처음 건축주를 만났을 때, 그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건축적으로 담아내고 싶었나요?
제안을 받고 젊은 작가의 공간을 만드는 일에 대해 고민하면서, 평생에 걸쳐 축적되고 확장될 ‘젊은 작가의 시간과 성장의 궤적’을 담아낼 바탕을 만들고 싶었어요. 클라이언트는 조각에서 회화로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어가던 젊은 작가였고, 단 한 점의 대표작보다 긴 시간 이어온 사유와 실험의 총합으로 자신의 예술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겪게 될 예술적 변주와 성장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장 덜어낸 상태이면서 무엇이든 더해질 수 있는 정직한 여백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대형 캔버스를 다루는 작가에게 집과 스튜디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업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건축주가 작가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주택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작가가 사는 집’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간적 조건이 있었나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작품의 반입·반출 동선과 안정적인 작업 환경이었어요. 대형 캔버스를 다루는 작가에게 집과 스튜디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업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이 손상 없이 이동할 수 있도록 창과 문의 크기, 계단 난간의 디테일까지 작품의 크기와 회전 반경을 기준으로 계획했어요. 2층의 슬릿형 개구부와 3층의 호이스트도 이런 조건에서 나온 요소들이고요. 작업실은 캔버스를 걸 수 있는 벽면을 최대한 확보하고, 상부 고측 창과 라인 조명을 통해 날씨와 시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균질한 빛 환경을 만들었어요.
[덜어내고 열어두는 건축]
– 외부에서는 집의 규모와 층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여러 수평적인 켜를 겹쳐 보여주고 있는 게 인상적인데요?

저는 건축이 분명한 존재감을 갖는 것은 좋지만, 과시적이기보다 덩어리 그 자체에서 오는 힘을 더 선호해요. 이 집은 대지가 진입 도로보다 높고 3개 층으로 이루어진 만큼 주변보다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어요. 대신 현란한 형태는 피하고, 기존 도시 조직을 따라 배치하면서 건물 전체를 수평 띠로 둘러 하나의 볼륨으로 읽히도록 했어요. 주변을 모방하기보다 과도한 기교를 덜어내고, 덩어리 자체가 풍경 속에 정직하게 서도록 한 거예요. 그런 점에서 도널드 저드(Donald Judd)가 오브제 자체의 존재와 공간의 관계에 집중했던 태도와도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도널드 저드(Donald Judd) –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반복을 통해 오브제 자체의 존재와 그것이 놓인 공간의 관계를 탐구한 미국의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작가
“앞으로 작가가 겪게 될 예술적 변주와 성장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장 덜어낸 상태이면서 무엇이든 더해질 수 있는 정직한 여백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 완공된 순간의 모습보다 재료가 낡고 교체되며 변화할 가능성까지 고려하고 있잖아요. 건축에서 ‘완성’이라는 상태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가난한 부자(The Poor Little Rich Man, 1900)」에는 건축가가 슬리퍼의 색상까지 통제해 결국 자신의 집에서 불행해진 부자가 등장해요. 완벽하게 완성된 집이 오히려 거주자의 삶을 구속하게 되는 이야기죠. 건축에는 ‘완공’은 있어도 절대적인 의미의 ‘완성’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완공은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건물이 변하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쉽게 교체하고 고쳐 쓸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고, 시간이 지나며 거주자의 필요에 따라 덧대고 바뀔 수 있도록 했어요.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가난한 부자(The Poor Little Rich Man, 1900)」 – 건축가가 가구와 장식, 생활용품까지 집 안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디자인해버리면서, 정작 집주인은 자신의 취향대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통해 ‘완벽한 집’이 오히려 삶을 구속할 수 있음을 풍자한 글

– 설비를 감추기보다 드러내고, 경우에 따라 쉽게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인상적이에요.
미와 실용을 대립하는 관계라기보다 ‘사용자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라봐요. 모든 설비를 벽 안에 감춘 매끈한 공간도 가치가 있지만, 정연하게 배열된 배관이나 노출된 H형강과 데크플레이트처럼 구조와 설비 자체가 가진 질서에도 미학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능에 충실한 것들이 그대로 드러날 때 생기는 아름다움이 있는 거죠. 구조와 설비를 숨기지 않으면 거주자는 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잘 이해하고 필요에 따라 개입할 수도 있어요. 그런 정직함이 실용적이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 주택을 설계하면서 건축가는 건축주의 현재 생활뿐 아니라 앞으로 변화할 삶까지 어느 정도 예상해야 했을 텐데요. 변화할 수 있는 삶을 위해 건축이 어디까지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단독주택은 보편적인 대중을 위한 작업이라기보다 특정 개인의 삶에 세밀하게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무조건 열어두는 것이 좋은 건축은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변화가 가능한 범위를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구조와 설비처럼 오래 유지되어야 하는 부분은 명확하게 정하고, 가구나 공간의 쓰임처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은 조금 느슨하게 남겨두는 방식이죠. 이 집은 건축주가 기존 주거의 익숙한 형식을 덜어내고 싶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관성적인 틀에서 벗어난 공간을 만들 수 있었어요.
“건축에는 ‘완공’은 있어도 절대적인 의미의 ‘완성’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집이 삶과 도시를 만나는 방식]
– ‘이작가의 집’에서는 골목과 집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닫지 않고 느슨하게 설정했어요. 개인의 공간인 집이 도시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집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지만 도시와 완전히 단절되기보다는 관계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경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집에는 높은 담장 대신 메쉬 울타리와 조경으로 최소한의 경계만 두었어요. 오랫동안 비어 있던 땅에 3층 건물이 들어서는 만큼, 높은 담장까지 둘러 그 자리가 골목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골목에서는 집의 정원이 보이고, 집 안에서도 골목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죠. 오래된 골목과 새로운 건물, 이웃과 개인의 삶이 가까운 거리에서 겹치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집 하나가 독립된 섬처럼 존재하기 어려워요. 결국 이런 작은 선택들이 도시와 이웃을 대하는 건축의 태도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 ‘이작가의 집’의 설계를 시작할 때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 있었나요?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먼저 고민해요. 또한, ‘작가에게 집과 작업실은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어요. 화가에게 작업실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장소가 아니라 미완성의 작업과 도구, 생활과 사유가 한데 얽히며 작품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건축주가 영감을 받는 빌렘 드 쿠닝, 게오르그 바젤리츠, 도널드 저드의 작업실도 살펴봤어요. 다만 그들의 작품 형식을 가져오기보다는 작업과 재료를 대하는 태도에 주목했어요. 결국 이 집 역시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 창작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담담하게 배경이 되는 공간이어야 했어요.
“건축가가 미리 그려놓은 장면에 머무르지 않고, 거주자의 생활과 창작에 따라 공간이 계속 달라지는 것 자체가 이 집이 의도했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 실제 완공된 ‘이작가의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설계 당시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거나 건축주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공간이 있었나요?
날것의 작업 도구와 일상의 흔적들로 공간이 채워지는 모습을 보면, 진짜 작가의 집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층의 확장 공간은 도면 상으로 작품 반출 대기 공간, 동료들과의 휴게 공간, 야외 작업 공간 등으로 구분했지만 실제로는 경계 없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3층 다용도실과 메자닌도 회화 도구와 원자재가 쌓이며 자연스럽게 작업의 일부가 되었고요. 건축가가 미리 그려 놓은 장면에 머무르지 않고, 거주자의 생활과 창작에 따라 공간이 계속 달라지는 것 자체가 이 집이 의도했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 ‘이작가의 집’은 2026 서울특별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했어요. ‘이작가의 집’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건축적 태도를 한 가지로 이야기한다면요?
기존 주택의 익숙한 답이나 관성적인 통념을 반복하지 않고, 거주자의 고유한 삶의 방식에 밀착하는 태도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의 주거 문화에는 깔끔하고 매끈한 마감이나 정형화된 공간 구성이 좋은 집의 기준처럼 받아 들여지는 경우가 많아요. 물론 그런 방식이 주는 편리함도 있지만 그것 만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집은 건축주가 불필요한 장식과 주거의 관습을 덜어내길 원했기 때문에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할 수 있었어요. 기존 형식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공간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 Profile –

비건축사사무소 / 윤은주 건축가
도시와 건축을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재해석해 공간과 사물로 확장하는 비건축사사무소는 물리적인 환경과 그 너머의 숨은 이야기를 구현하는 아이디어 기반의 설계사무소이다.
윤은주는 한양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5년간 정림건축에서 실무 후, 2022년 부터 비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건축상 우수상(2026), K-design award GOLD WINNER(2026), IF design award WINNER(2022), 서울 산책 건축 공모전/우리동네 좋은집 찾기 동상(2019) 등을 수상했다.
비건축사사무소 홈페이지 https://be-architects.imweb.me
다음 [비욘드 아키]에서는 또 다른 건축물과 또 다른 건축가의 시선으로 프로젝트 너머의 건축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볼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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