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한라산 쪽의 여유로운 풍경이 남아 있는 해안동, 완만하게 기울어진 대지 위에 연안재가 자리한다. 도로에서 안쪽으로 높아지는 땅과 멀리 보이는 제주 바다, 대지 앞을 지키고 있던 오래된 왕벚나무는 집의 배치와 시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됐다. 경사를 평평하게 다듬는 대신 땅의 높이를 따라 집과 마당을 조금씩 달리하고, 중정과 여러 외부 공간을 사이에 두어 가까운 나무와 마당에서 먼 바다까지 풍경이 겹쳐지도록 했다. 하나의 연속된 지붕 아래에는 중정과 마당, 처마와 툇마루, 필로티가 이어지며 제주 특유의 바람과 빛, 비를 일상 가까이 끌어들인다.
연안재는 제주 전통 민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안에 축적된 삶의 방식을 오늘의 주거로 옮긴 집이다. 안거리와 밖거리처럼 부모와 자녀의 공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낮은 돌담은 집과 마을 사이의 시선을 부드럽게 조절한다. 천연 슬레이트와 구운 대나무처럼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변하는 재료 역시 집이 주변 풍경에 조금씩 스며들도록 한다. 제주다운 형태를 만드는 것보다 땅과 기후, 가족의 생활을 세심하게 읽는 과정에서 지역성을 찾고자 한 연안재를 통해, 전통의 삶이 오늘의 집으로 이어지는 방식과 시간 속에서 장소에 익숙해지는 건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ditor 김도아
▼ List ▼
→ [대지를 읽는 방식]
→ [제주에서 이어온 삶의 방식]
→ [날씨와 일상 사이]
→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
[대지를 읽는 방식]

– 연안재는 제주 도심과 가까우면서 한라산 쪽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진 해안동에 자리한 주택이에요. 처음 대지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장소의 조건이나 가능성은 무엇이었나요?
처음 대지에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완만하게 기울어진 땅과 그 너머로 열린 풍경이었어요. 도로에서 대지 안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졌고, 북쪽으로는 멀리 제주 바다가 보이며 도로와 대지 사이에 있던 오래된 왕벚나무도 인상적이었어요. 대지를 여러 번 오가며 어느 높이에서 바다가 보이는지, 바람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나무와 주변 풍경이 어떻게 겹쳐지는지를 제일 먼저 살폈어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기보다 안에 담긴 삶의 방식을 오늘의 주거에 이어가는 게 중요했어요.”
– 구체적으로 이러한 지형과 조망은 건축물의 배치와 공간 구성에 어떻게 반영했나요?
땅을 평평하게 정리하기보다 기존 경사를 따라 집과 마당의 높이를 달리했고, 가까운 마당과 왕벚나무 너머로 바다가 이어지는 장면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에 따라 집 안을 이동할 때 바닥과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고, 같은 풍경도 공간마다 조금씩 다르게 보이도록 계획했어요. 바다를 향해서도 모든 공간을 한 방향으로 열기보다는 중정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여러 겹을 지나도록 했죠. 가까운 식재와 마당을 먼저 보고 그 너머로 바다와 수평선을 만나게 되는 방식이에요. 지형의 높이 차이가 공간의 높이와 시선의 깊이를 함께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제주에서 이어온 삶의 방식]
– 연안재는 제주 전통 민가의 공간 논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주택으로 소개되고 있어요. 전통의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오늘의 생활에 맞게 옮겨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제주 전통 민가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형태보다 그 안에 담긴 생활 방식이었어요. 안거리와 밖거리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돌담과 처마, 툇마루가 기후에 대응하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도 조절해왔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연안재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현재의 가족에게 맞게 풀어내고자 했어요. 부모와 자녀의 공간은 어느 정도 독립시키되 중정과 마당을 통해 서로의 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실내와 외부 사이에는 처마와 툇마루를 두어 생활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했어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방식을 오늘의 주거에 이어가는 것이 중요했어요.
* 안거리(안채) – 마당 안쪽에 위치한 주된 건물로 보통 부모 세대가 거주하는 중심 공간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
* 밖거리(바깥채) – 안거리 맞은편에 있는 건물로 보통 결혼한 자녀 세대가 분가해서 살거나 독립된 살림을 하는 공간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

“지역성은 익숙한 형태나 재료를 반복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그 땅의 높이와 바람, 주변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활을 세심하게 살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 1.2m 높이의 낮은 돌담은 집을 감싸면서도 폐쇄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집과 마을, 거주자와 이웃 사이의 관계를 생성하는 거 같은데요?
제주의 오래된 마을을 보면 돌담이 집과 길을 구분하면서도 시선을 완전히 막지는 않아요. 담 너머로 지붕이나 나무가 보이고 집 안의 기척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죠. 연안재의 돌담도 그런 관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1.2m 높이는 몸은 가려주면서 시선은 그 위로 넘어갈 수 있어요. 집의 영역과 생활은 보호하면서도 주변 풍경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 높이인 셈이에요. 길에서 돌담, 마당, 처마를 지나 실내로 들어오면서 집의 경계가 한 번에 나뉘기보다 천천히 깊어지면서 서로의 존재는 느끼되 필요한 만큼의 거리는 유지되는 관계를 생각했어요.
– 제주 전통 민가의 안거리와 밖거리 개념을 적용해 자녀를 위한 독립된 공간을 별채 형식으로 구성했어요.
안거리와 밖거리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한 울타리 안에서 가족이 함께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연안재에서도 자녀의 공간을 부모의 생활 공간과 조금 떨어뜨려 구성했어요. 중정과 마당을 통해 연결되지만 출입과 생활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요. 또 가족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달라지잖아요. 자녀가 성장해 집을 떠날 수도 있고, 지금의 자녀 공간이 나중에는 손님방이나 작업실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하나의 기능에 고정하기보다 가족의 변화에 따라 다른 쓰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었어요. 즉,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시간을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날씨와 일상 사이]
– 연안재는 하나의 연속된 지붕을 가지면서도 곳곳에 틈을 두어 바람길을 만들고 환기를 유도하고 있는데요. 제주라는 지역의 바람과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공간적 전략을 고민했나요?

제주에서 집을 지을 때 바람은 피하기보다 적절히 받아들이고 걸러내야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을 완전히 닫아버리면 강한 바람은 막을 수 있지만 빛과 공기, 계절의 변화까지 함께 차단하게 되니까요. 연안재에서는 중정과 마당, 건물 사이의 틈을 연결해 바람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빠져나가도록 했어요. 남동쪽에는 구운 대나무를 두 겹으로 세워 강한 바람과 외부의 시선은 걸러내면서 빛과 공기는 통과하도록 했고요. 깊은 처마는 강한 일사와 비를 막아주면서도 외부 공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기후를 막는 집보다는 제주에서의 날씨를 적당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 자연스럽게 생긴 경사지에 순응하며 조성된 여러 마당은 각각 다른 깊이와 성격을 가진 완충공간처럼 보여요.
경사진 땅을 따라 집의 높이가 달라지면서 진입 마당과 중정, 각 실내에 면한 작은 마당들이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각각 높이와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서 집 안을 이동하는 동안 서로 다른 외부 공간을 만나게 돼요. 마당은 실내의 생활을 바깥으로 이어주는 여백이라고 생각했어요. 문을 열면 거실의 생활이 중정으로 이어지고, 툇마루에 앉으면 안과 밖의 경계도 느슨해지거든요. 특별한 용도를 정하기보다 식사를 하거나 잠시 앉아 있거나 때로는 비어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 여백 속에서 빛과 바람, 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랐어요.
“기후를 막는 집보다는 제주의 날씨를 적당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집을 만들고 싶었어요.”
– 실내의 모든 공간이 중정을 향하도록 계획된 점이 인상적이에요. 중정은 이 집에서 가족의 일상과 시선, 빛과 바람을 어떻게 모아주는 공간인가요?
연안재의 각 공간은 중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해요. 거실에서 건너편 공간을 바라보거나 복도를 걷다가 다른 가족의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고, 각자의 공간에 머물면서도 서로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요.
또한, 중정은 동시에 빛과 바람, 계절이 들어오는 공간이기도 해요. 하루 동안 그림자가 움직이고 비가 내리는 모습이나 식물의 변화를 집 안 깊숙한 곳에서도 볼 수 있어요. 한 마디로 가족의 관계와 자연의 변화가 중정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연결되도록 했죠.


– 깊은 처마와 툇마루, 필로티 하부 공간은 변화가 큰 제주 날씨에 대응하는 장소인 거 같아요. 이 반외부 공간들이 거주자의 일상 속에서 어떤 장면을 만들기를 바랐나요?
제주는 날이 좋다가도 갑자기 비가 내리고 바람의 방향도 자주 달라져요. 그래서 실내와 마당 사이에 날씨와 관계없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처마 아래에서는 비가 내려도 문을 열어둘 수 있고, 툇마루에서는 마당을 바라보며 쉬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필로티 아래에서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고요. 저는 이런 반외부 공간을 통해 집 안에 있으면서도 바람과 빛을 느끼고, 밖에 있으면서도 건축의 보호를 받는 경험을 일상의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어요.
“연안재도 시간이 지나 나무가 자라고 재료의 색이 변하면서 가족의 생활 흔적과 함께 조금씩 이 땅에 익숙해지는 집이 되었으면 해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집]
– 천연 슬레이트 지붕과 구운 대나무 외벽은 제주의 자연환경에 대한 응답처럼 보여요. 재료들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제주의 바람과 비, 습도를 견딜 수 있는지와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를 중요하게 봤어요. 처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재료보다는 햇빛과 비를 맞으며 색과 질감이 자연스럽게 변하는 재료를 선택하고 싶었어요. 천연 슬레이트는 낮게 이어지는 지붕을 차분하게 잡아주고, 날씨에 따라 색과 표정이 달라져요. 그리고 구운 대나무는 빛과 공기는 통과시키면서 바람과 시선을 걸러주는 역할을 해요.
저는 재료들을 선택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재료들이 주변의 나무와 돌담, 땅의 색에 조금씩 가까워져 집이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기를 기대했어요.


– 연안재는 제주 전통 주거의 태도를 바탕으로 오늘날 가족의 생활과 지역의 기후를 함께 담아낸 집으로 해석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연안재를 통해 제주 주택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역성과 현대적 삶을 함께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주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꼭 제주를 닮은 형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곳에서 사람들이 오래 살아오며 만들어온 공간을 살펴보면 지금도 유효한 원리가 많이 남아 있거든요. 바람을 걸러내는 방법이나 마당을 사이에 둔 가족의 거리, 처마 아래에서 안과 밖의 생활을 이어가는 방식 같은 것들이 있겠죠. 지역성은 익숙한 형태나 재료를 반복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그 땅의 높이와 바람, 주변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활을 세심하게 살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연안재도 시간이 지나 나무가 자라고 재료의 색이 변하면서 가족의 생활 흔적과 함께 조금씩 이 땅에 익숙해지는 집이 되었으면 해요. 제가 생각하는 지역성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
– Profile –

이성범 건축사사무소 / 이성범 건축가
이성범은 건축을 공공성과 일상성의 접점에서 사유하며, 사용자의 경험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일상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건축이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안과 여운을 줄 수 있도록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프로젝트를 통해 그 가능성을 구체화하고 있다. 공간건축(SPACE GROUP)과 여러 아틀리에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후 현재 이성범건축사사무소(LSBA)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성범 건축사사무소 홈페이지 http://leesungbeom.com
다음 [비욘드 아키]에서는 또 다른 건축물과 또 다른 건축가의 시선으로 프로젝트 너머의 건축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볼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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