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 증도의 태평염전, 빽빽한 갈대숲을 따라 좁은 비포장길을 지나면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작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 염부들의 숙소였지만 철거가 중단된 채 폐허처럼 남아 있던 이곳은 이제 예술가들이 머물며 주변의 풍경을 관찰하고 작업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스 ‘스믜집’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 오래된 건물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재료와 쓰임을 하나씩 덧대며 완성된 스믜집은 장소와 시간의 흔적을 섬세하게 이어낸 작업으로 2023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다.
갈대숲과 염전, 갯벌과 오래된 소금창고에서 발견한 색과 질감은 건축의 재료로 이어졌다. 소금 결정처럼 빛을 반사하는 아연도금 골강판과 불에 그을린 가문비나무,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멘트 블록과 각파이프에는 장소의 풍경뿐 아니라 이곳에서 건물을 만들고 유지해온 방식까지 담겨 있다. 과거의 시간을 품은 건물에 새로운 시간이 겹쳐지고, 그 안에서 다시 예술가들의 경험과 작업이 쌓여간다. 스믜집을 통해 오래된 건축을 바라보는 방식과 지역의 조건을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Editor 김도아
▼ List ▼
→ [갈대숲에서 발견한 새로운 쓰임]
→ [염전의 풍경을 닮은 재료]
→ [손으로 쌓고, 시간을 덧대는 방식]
[갈대숲에서 발견한 새로운 쓰임]

– 스믜집은 태평염전의 오래된 염부 숙소를 아티스트 레지던스로 바꾼 프로젝트인데요. 처음 이 건물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가능성은 무엇이었나요?
클라이언트에게 “아티스트 레지던스”라는 프로그램 요구사항을 들은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정보도 없이 건물을 보러 갔어요. 인적이 없는 외딴 곳에 있기도 하고 철거를 하다가 만 상태로 아주 오래 방치된 건물이라 말 그대로 폐허라고 할 만한 상태였어요. 벽에 문과 문틀은 없고 대신 해머로 내려친 거칠게 깨진 구멍들만 숭숭 뚫려 있었어요. 가까이서 찬찬히 보니 뜯다가 만 벽지가 너덜너덜거리고 있었는데 여러 겹으로 덧바른 흔적이 보였어요. 그걸 보다가 여러 겹으로 덧댄 건축의 표면이라는 주제가 떠올랐어요.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덧댄다는 아이디어는 뜯어진 벽지에서 영감을 얻은 면도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 대상지는 소금박물관과 염생식물원에서 떨어진 갈대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요. 저수지와 개천, 갈대숲으로 이어지는 장소성이 프로젝트의 방향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대상지로 들어가는 길은 무심코 지나치면 입구조차 찾을 수 없는 좁은 비포장길로, 갈대숲 사이에 나 있었어요. 길가의 갈대는 3m는 족히 넘을 만큼 높고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어요. 갈대숲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200m 걷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리면 시야가 갑자기 열리면서 건물 전체가 보이는 시퀀스였죠. 건물 안에서 창밖으로는 온통 바람에 너울거리는 갈대만 보였고, 마침 이쪽은 해가 뜨는 쪽이라 아침에 갈대숲 너머로 뜨는 해를 보는 풍경은 무척 멋졌어요. 그렇게 내부 공간의 관계로 푸는 것보다, 공간의 한 포인트에서 외부와의 연결을 최대한으로 만들어주는 방향으로 가보자는 결정이 난거죠.

– 스믜집은 ‘소금 같은, 예술’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으로서, 예술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작업하는 생활과 창작의 장면 중 어떤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공간의 한 포인트에서 외부와 강한 연결을 만들기 위해 기존 건물의 창문을 확장하고, 좁은 공간에 별도의 작업용 테이블을 두는 대신 창틀을 넓혀 책상으로 활용하기로 했어요. 지금까지 스믜집에 머문 20명 이상의 예술가들은 주변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사물을 모아 작업 공간에 펼쳐 놓았더라고요. 이처럼 자연이 작업에 깊이 관여하는 경험과 가로 세로 1.6미터의 커다란 창 너머로 갈대숲과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그들에게 영감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요.
[염전의 풍경을 닮은 재료]
– 증도의 자연과 염전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건축의 재료와 색감에 어떻게 반영하고자 하셨나요?
스믜집을 설계하기 몇 년 전부터 이 장소를 몇 번 다녔어요. 마구 헝클어진 것 같지만 탐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식물들과 갯벌 흙의 거친 야성미 그리고 엄청나게 넓게 펼쳐진 직사각형 구획의 염전, 그 위의 소금 결정, 얼기설기 지어져 몇십 년을 버틴 전통 방식의 목조 소금창고 등 장소가 가진 힘이 대단한 곳이에요. 그런 풍경에 새로운 건축이 얹혀졌을 때 이질감이 들지 않으려면 어째야 하나 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재료를 우선 고민해서 소박하고 거친 재료, 흙색을 닮은 재료 그리고 최대한 화학 처리를 하지 말자 하는 등의 원칙을 먼저 세웠죠.

“몇 년간 비를 맞으면서 표면이 얼룩지고 서서히 삭아가는 모습이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바라보곤 해요.”

– 사용하신 여러 재료 중 프로젝트에서 가장 튀는 재료가 있다면요?
한 가지 좀 튀는 재료라면 지붕에 사용한 아연도금 골강판인데, 현실적인 이유도 물론 있었지만 이 재료가 해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하늘을 반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사용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어떤 각도에서는 해를 번쩍하고 반사시키는데, 그 찰나를 일종의 메타포로 사용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염전에서 소금 결정이 맺히는 찰나는 언제 봐도 신기한데, 투명한 물색이 점점 탁해지다가 어느 순간 반짝이는 하얀 알갱이가 맺히거든요. 그런 순간을 지붕에 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죠.
– 외벽에는 표면을 태운 가문비나무가 사용되었는데요. 소금과 해풍이 있는 환경에서 이 재료와 그을림의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표면을 태우는 목재 가공 방식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에요. 일본 전통건축에 흔히 보이는 방식이고, 한국에도 가구 제작에 낙동, 낙송법이라는 기술이 있었어요. 표면의 탄화를 통해 화학처리 없이도 어느 정도 방부 효과를 낸다는 방식이어서 자연스럽게 적용하게 되었죠. 그런데 실현 과정은 순탄치 않았어요. 시공 품질의 표준화가 어렵고 유지보수가 까다롭다는 점 때문에 비용이 비싼 방식이었던 거죠. 방부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내구성이 길지는 않고 결국 마감재 교체 등의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재료인 것 같아요.


– 그럼에도 이러한 ‘불완전한 재료’를 선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염전이라는 지역의 특수한 재료 사용 방식도 영향을 주었나요?
염전의 운영 방식에서 단서를 찾았는데, 소금이 식품으로 관리되는 염전 구조물의 특성상 화학적 방부처리가 금지되어 있어서 ‘불완전’한 천연 송판을 사용하고, 금방 썩어버리기 때문에 마감재를 교체하는 일이 일상적인 곳이라는 점이었어요. 말하자면 이 지역에서 재료의 불완전함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건물의 마감재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다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어요. 외벽 가문비나무는 현장에서 지역 농민들이 일일이 토치로 태워서 만들었어요. 큰 비용을 들이지도 않았고요. 몇 년간 비를 맞으면서 표면이 얼룩지고 서서히 삭아가는 모습이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바라보곤 해요.
[손으로 쌓고, 시간을 덧대는 방식]
– 운송과 시공 여건이 어려운 환경에서 콘크리트 사용을 줄이고 시멘트 블록, 스틸 파이프, 합판, 목재 등 현장에서 다루기 쉬운 재료를 선택한 현실적 조건은 설계와 재료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스믜집은 태평염전 직원들과 지역 농민들이 지었어요. 시공 능력에 대한 예상이 없는 상태에서 계획했던 것들이 막상 현장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죠. 원래 외벽의 칸막이벽은 콘크리트로 계획했어요. 그런데 시공자가 벽 콘크리트 시공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고민 끝에 CMU 조적벽으로 교체했어요. 단층인 저예산 프로젝트에 중장비를 동원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하니, 의식적으로 인력으로만 시공하기 쉬운 재료로 계획을 변경해 갔어요. 대표적인 게 벽돌이나 시멘트 블록인데, 인부 한 명이 하나씩 들고 쌓으면 되는 재료이기 때문에 장비가 필요 없죠. 또 그쪽에선 아주 흔한 아연도 각파이프와 합판 등을 사용해서 시공자들이 익숙한 재료를 쓰도록 배려했어요.
– 지역 농민들과 태평염전 직원들이 직접 시공에 참여한 만큼, 설계 의도를 현장에서 구현하고 서로 소통하는 과정 역시 일반적인 현장과는 달랐을 것 같아요.
이런 재료들로 조금 까다로운 디테일을 만들어야 할 때는 솔직히 힘들었어요. 현장에서는 도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서울에서 상세한 스케치를 여러 장 그려서 보내고, 화상 통화를 하며 손짓과 발짓까지 동원해서 의사소통하려고 노력했어요. 또 중요한 공정일 때는 왕복 11시간 정도 걸리는 현장을 일주일에 세 번 오간 적도 있었죠. 현장에서 직접 그려가면서, 실수한 부분을 계속해서 고쳐 나가면서 천천히 완성해 갔어요.
“확장된 시간의 경험과 넓고 독특한 장소의 경험이 더해져서 예술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공간이 된다면 건축가로서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
– 스믜집은 오래된 염부 숙소의 시간을 지우기보다 그 위에 새로운 쓰임을 덧대는 방식으로 완성된 프로젝트로 보이는데요. 기존 건물의 흔적과 새롭게 더해진 요소가 만나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를 어디에 둘 것인가,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인가, 충돌하게 둘 것인가, 시간의 축적을 어떻게 보여줄까 하는 진지한 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이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타이트한 공사 예산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재료를 쓸까 하는 고민도 깊었어요.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덧댄다는 아이디어는 뜯어진 벽지에서 영감을 얻은 면도 있지만, 어찌 보면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덧대어진 겹을 가리지 말고 드러내자는 생각은 라운지 입구의 외벽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외벽에 감춰져 있어야 하는 벽의 단면을 잘라서 그대로 노출시켰어요. 40년 전의 건물 외벽 재료와 거기에 덧대어진 새로운 구조, 외벽 마감재가 겹겹이 포개어져서 보여요.

– 이러한 시간의 축적과 건축적 흔적을 통해, 낡은 지역 건축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다시 쓰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으셨나요?
스믜집에 있으면 건물의 구석구석에서 과거의 모습이 보여요. 그러한 부분들이 건축 경험의 시간의 축을 몇십 년의 길이로 확장시키고, 현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과거의 삶을 겹쳐서 경험하도록 만들어요. 그렇게 확장된 시간의 경험과 넓고 독특한 장소의 경험이 더해져서 예술가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공간이 된다면 건축가로서 무엇에 비할 바 없는 보람을 느낄 것 같아요.
– Profile –

TCA 건축연구소 / 조웅희 건축가
조웅희는 TCA의 대표이자 홍익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다. 한국, 미국, 독일에서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미술관, 집합주거, 학교, 도서관, 오피스 등 폭넓은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2021년부터 TCA를 운영하고 있다.
TCA the concrete abstract는 구체와 추상이라는 단어의 약자로, 건축에 작용하는 추상적, 구체적 사고와 물질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가진다. 문화, 예술, 공공, 주거 등 다양한 분야의 건축 프로젝트와 더불어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등의 전시와 환경조각 등 개념예술 작업과 소재 리서치 프로젝트 등 관련분야로 관심을 확장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TCA 건축연구소 홈페이지 https://www.theconcreteabstract.com/
다음 [비욘드 아키]에서는 또 다른 건축물과 또 다른 건축가의 시선으로 프로젝트 너머의 건축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볼 예정입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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