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첫 만남
“여기 어딘 거 같은디?”
내비게이션이 멈추자 택시기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내릴게요.”
영상감독과 함께 내린 논현동의 한 골목.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골목 앞에서 감으로 선택한 길로 들어가 건물 벽에 적힌 지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256-13, 256-14, 256-15?”
“이쪽 골목인 것 같은데요?”
도면으로만 보다가 처음으로 마주친 ‘아뜰리에 채연’은 256-9라는 숫자 그리고 촘촘한 주택 사이에 하얀 이마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가끔씩 올려다본 넓고 흰 벽에는 지는 해를 따라 맞은편 지붕의 그림자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다양했다. 외부에서 지하1층으로 내려갈 것인가, 정면을 향해 입구로 들어갈 것인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하고 들어가면, 엘리베이터로 올라갈 것인가, 계단으로 올라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되는데 우리는 1층 입구로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그 와중에 난데없이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생각났다. 가지 않은 길이 더 아름다운 길이라고, 나는 1층으로 들어서면서도 지하1층이 궁금해졌다. 그래서인지 촬영할 때 지하 썬큰공간(sunken space)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찍었었나 보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흰색의 외피로 쌓여 있는데 건물과 외피 ‘사이로’ 해가 들어 창문을 가리지 않아도 주변 건물들과 서로 사생활 침해가 되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외피와 건물 사이는 바람과 해가 드나드는 공간의 여지가 있어 우리가 지나다니는 동선에 따라 바닥과 벽으로 빛과 그림자들이 노는 듯 보였다.
“바닥 사진 좀 찍어주세요.”
바닥을 보자 나와 영상감독 그리고 로디자인 대리의 그림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와 다르게 그림자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려니 제스처와 장난이 솟아났다. 한쪽은 외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반대편은 전체 벽 한 면이 통 유리의 창으로 건물 뒤편의 골목이 내려다 보였다.
우리가 건물을 살펴보면서 주목했던 공간은 이동공간이었다. 컬렉션이 취미인 건축주의 소품들과 4층 높이를 굽이굽이 잇는 하얀 난간 그리고 뒷집의 벽돌 벽이 통 유리 안으로 그대로 비춰, 오르고 내릴 때마다 흥미로운 시야들이 대각선으로 펼쳐졌다.
“계단을 사선으로 보고 있으면 마술 쇼에서 박스 안에 들어간 사람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것처럼,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의 상체와 하체가 한 사람처럼 보이는 착시가 있는데요?”
뭣보다 계단은 컬렉션뿐만 아니라 사람의 움직임까지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구조였으나 그 장면을 촬영하기엔 공간의 규모가 타이트해 나오지 못함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건물을 나와 근처 S카페에 가 영상감독과 한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화각은 어떠하며 서로 어떤 특징을 보았고 느낌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하다 바닥을 쳐다보던 영상감독이 말했다.
“어? 무지개다. 어?? 저기도 무지개네요. 사방에 무지개들이 난리가 났어요. 너무 바쁘게 살면 안 되요. 이런걸 보면서 천천히 살아야죠.”
유리 난간에 투영된 햇빛이 작은 무지개들로 흩어져 바닥과 테이블, 사람들의 다리, 가방, 벽에 묻어 있었다. 그날따라 햇빛이 자꾸 눈에 밟힌 걸 보면 아뜰리에 채연에서는 빛을 활용해야겠다는 인상이 오래 남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까진 몰랐다. 내가 기획을 하면서 직접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게 될 줄은.

02 건축가 미팅: scenery envelope
김동진 건축가: 건축주가 화선지에 글을 쓰는 일을 하시는 분이고 임대공간이라는 점을 기반으로 건물의 외피도 콘크리트에 하얀색 스테인을 먹였어요. 콘크리트의 물성을 살리면서 건물이 배경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화이트 빛을 넣은 거지요. 거주자들이 채워가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마감 없이 노출을 해 놓았고요. 건물 자체는 큰 막으로 막고 안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로 했어요. 외피는 편지봉투가 컨셉이에요. 봉투는 안의 내용물이 중요하고 그 내용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에 배경으로 작용하는 봉투의 컨셉으로 건물을 디자인 했습니다. 제가 중점을 둔 공간은 사이공간, 이동공간, 정주공간, 썬큰공간이에요. 건물의 폭을 크게 잡고 안에 사이공간을 만들어 빛은 시원하게 들어가지만 옆집과 서로 침해하지 않는, 안으로 파져 있는 공간이에요. 표피와 실제 용접건물과의 사이공간은 환기와 채광도 담당하지만 여유를 줄 수 있는 공간으로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의 컨셉으로 땅과 연결된 부분은 돌과 목재를 사용했고요, 건물의 안과 밖 재료를 통일했습니다. 지하 1층의 썬큰공간은 빛을 넣기 위해 마련되었고요, 4층엔 건물주가 앉아서 작업하는 공간으로 실내로 작은 창이 나 있는 정주공간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동공간은 법규규정에서 50cm를 더 넓혀 이동공간이자 컬렉션이 취미인 건물주의 소품들을 전시하여 창고 대신 개인 박물관이 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활용했어요.
김성민 영상감독: 저는 빛으로 움직임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부에서는 건물간의 폭이 좁아 풀샷(full shot)을 담기 힘들 것 같고요. 그림자로 이동을 담을 수도 있고, 실내 위주로 한 곳을 오랫동안 고정 촬영한다면 시간대별로 움직이는 빛의 움직임을 따라서 구조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동진 건축가: 네. 이 건물의 컨셉은 배경만 만들어주고 그 안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기에 움직임으로 빈 공간을 채우는 건 어떨까요? 그 컨셉만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드러나지 않아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배경적인 공간이 새로운 장소로 태어날 수 있도록 영상이 만들어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03 안무 그리고 촬영
촬영한 공간은 지하, 썬큰공간, 이동공간, 2층, 사이공간 그리고 건물을 감싸고 있는 외벽이다.
안무에 대한 고민이 컸다. 임대공간인데다 이야기가 아직 쌓여 있지 않은 신축건물이고, 배경으로 존재하는 건물이 컨셉인 이 공간에서 어떤 주제를 만들어 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공연이나 영상제작방식처럼 시나리오를 만들어 공간을 채우자니 짧은 샘플 영상에 담기에는 시나리오보다 컨셉을 잡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건축과 무용이 포괄적인 장르이다 보니, 이야기로 풀어내어 공감대를 확장시키려면 몸으로 건축을 해석하는 접근보다 이야기와 그로 인한 장소성에 더 집중해야 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여러 구성안이 있었으나 인테리어가 들어가기 전 촬영은 신속히 이뤄져야 했고, 조명이 아닌 최상의 날씨에서 촬영을 해야 했지만 4월 봄 날씨는 매우 변덕스러운 상황이었다. 건축을 기반으로 안무를 짜야 한다는 답답한 마음에 나는 건축가도 아니면서 무심코 도면을 펼쳤다. 그리고 도면과 모든 텍스트들을 살펴보다 건축가가 메모해 놓은 글귀 위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주택마련을 위해 대출을 일으키는 무모한 하우스푸어는 사라지고 있고, 전원주택의 삶에 대한 동경으로 귀농하던 잠시의 열기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따라서 수익형 부동산 투자로의 전환으로, 거주할 집이 결합된 근린생활시설과 같은 임대 수익형 건물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점점 도심 속 작은 건물들은 일터와 주거생활 그리고 수익성이 결합된 실재적 삶의 일상을 담을, 새로운 유형의 건축으로 변모할 것이다.’
보편화된 일상과 일상 공간 그리고 도시의 모습, 그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지속했다. 그리고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 중점을 둔 배경으로서의 건축을 생각하며 그곳에 비치는 햇빛이 머릿속에 다시 들어왔다.
‘안무 컨셉은 빛이 공간을 여행하듯이’
두 손은 날개가 되었다가 손이 되기도, 새가 되기도, 공간의 테두리가 되기도 하며 경계를 짓고 해체하기를 반복한다.
실제 촬영을 하면서 나에게는 두 개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비둘기(Pigeon)’와 ‘두 여성(Deux Femmes)’이었다.
지하1층의 발 동작은 도면의 형태를 바라보고 공간의 깊이와 너비를 표현, 이러한 동작은 지하에 빛을 넣기 위해 마련된 썬큰공간과의 장면을 연결했다.
손을 촬영하기 전에 영상감독 앞에서 마치 수화를 하듯이 손을 움직이며 이야기했다.
“사각을 한 두 손은 건물, 그 선이 연장되어 커지면서 이야기가 시작 되요. 두 사람이 여행을 하는데 서로 지지가 되어주기도 하고 함께 날아가기도 하고, 시간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감싸기도 하는 거죠. 마치 이 건물처럼.”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해는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 카메라의 각도와 손의 방향을 바꿔가며 촬영을 해야 했다.
신체의 부분으로 진행되는 발, 손 동작 그리고 그림자들이 각 공간을 이야기한다면 전신 그림자가 나오는 장면은 몸이 건물로 대체되길 바랬다.
2분이 채 되지 않는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하루 동안 이 건물에 비치는 해를 따라 다니며 움직이다 보니 새삼 도시에서도 햇빛이 산다는 걸 생각하게 됐다. 해의 길은 변하지 않으나 공간의 구조와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의 빛을 만나고 그로 인해 사람의 동선과 배치와 움직임이 달라짐을 말이다.
‘City, Space, Travelling’
다소 진부한 타이틀일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하고 진부한 그 자리에서 잃어버린 처음을 만날 때도 있다.
영상에 사용한 음악은 무용음악가 Tanz EDM의 ‘One of those days’로, 중얼거리는 여성의 말소리가 보편적인 도시의 일상을 표현하는 데 또 한 번 공간의 드라마타이즈를 해 준 것 같다.
글/양은혜